흰색 ‘벽’ 이었다.
사방에는 단지 흰색 벽이 새워져 있었지만 나는 결코 흰색 벽에는 닿을 수 없었다. 벽을 향해 달려가면 벽은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간다.
‘하지만 아무리 벽을 향해 달려도 지치지 않아’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멀어져만 가는 느낌 너무나도 익숙해...
중요한 걸로부터 너무나도 멀어져 버린 느낌,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느낌.
그렇다. 죽음이다. 난 분명 죽었다.
그럼 여긴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주위가 모두 흰색이니까 여긴 분명 천국이겠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한 듯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미워질 때 쯤 벽면에 하나의 글귀가 생겨났다.
“저희는 당신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이 문을 통해서 다시 돌아가세요. 하지만 당신의 기억은 계약에 따라 저희가 다 가져가겠습니다.”
계약... 생소한 단어였다. 생전에 내가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그중에서 내가 계약이란 일을 했었는지, 언제 했었는지 기억해 보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을 넘긴다.‘ 라는 그런 무서운 조건이 걸려있는 계약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정말로 한순간의 찰나였다. 그러던 도중 이 순백색의 장소에 왔었던 기억,
어렸을 적의 기억,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16살인 내가 부친상을 당했을 적의 일이다. 나약했던 나는 삶의 의욕조차도 다 잃었다.
나의 유일한 가족이셨던 아버지는 약간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상냥하고 때로는 엄하시며 나를 가장 생각해 주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산불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갔다.
한밤중에 산 중턱에서 난 불은 빠르게 커져만 갔고,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우리 집을... 덮치고 난 후였다.
난 곧바로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미 방은 연기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가득 차 있었고 아버지의 휠체어의 바퀴는 떨어지는 잔해에 의해서 이미 부셔졌다. 이 상태에서 아버지를 부축해서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어서 마을로 내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산불을 알려주렴, 안 그럼 더 피해가 커질 거야.”
마지막 까지 남을 걱정하셨던 아버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셨던 아버지는 끝까지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사셨다.
“전 할 수 없어요. 저 같은 겁쟁이가, 나약한 저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어요.”
무력했다. 그 한마디로 날 표현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태어났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 이었다. 그 순간 벼락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널 그렇게 가르친 줄은 몰랐다!!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일하라는 나의 말은 그냥 장식이었던 것이냐? 죽더라도 부끄럽게 죽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끄러워서 죽을 수가 없구나.”
무언가가 내 가슴을 관통하는 기분, 아버지의 입에서 죽음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 마지막 까지 누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빨리 마을로 가거라!!”
어버지가 나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씀이었다.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지쳐 쓰러질 정도로 피곤했지만 마지막 남는 힘을 다 해서 외쳤다.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결국 나는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이유로.
그래 사실이다. 난 마을 사람들을 구했다. 그런데 왜 영웅의 아버지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까?
‘그래 아버지의 죽음이란 존재는 나라는 허물에 가려져 버린 거야. 단지 나의 영웅담을 좀 더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어...’
‘그래 나는 사람들을 도왔고 나의 나약함을 극복 했어. 하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는 이제 영원히 비어있을 거야.’
‘이런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은 나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아. 아버지는 도구가 아니야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살아남은 거라고!! 왜 그걸 내가 이런 사람들을 내가 꼭 도와줄 필요가 있었던 걸까?’
난 점점 삐뚤어져 갔다. 거의 8년 동안 밤낮에 상관없이 오른 손에는 술병이 왼손에는 담배가 그리고 등 뒤에는 영웅이 아닌 인간 말종 이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했다. 그래 영광이란 것은 한순간인 것이다.
‘그때 모두 다 함께 불타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이런 일도 없었겠지. 이젠 나를 붙잡아줄 사람도, 내가 지켜줄 사람도 아무도 없다. 이미 나는 나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손에는 기름과 작은 성냥이 들려있다. 그리고 등 뒤에는 낙하산 줄. 완벽했다. 다 함께 죽으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 그래 같은 시간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그때와 모든 것이 일치 했다. 단지 죽는 사람들이 다를 뿐 이었다.
기름을 바닥에 붙고 성냥을 한 개비를 꺼냈다. 불을 붙였다. ‘치직’ 아름다운 소리였다 성냥의 끝부분은 주황색의 불꽃이 일렁거리면서 따뜻함을 내뿜고 있었다.
“그래, 따뜻하구나. 따뜻함과 뜨거움은 종이 한 장 차이야. 따뜻함이 약간만 과해지면 뜨거움이 되어 버리지 내가. 받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따뜻한 동정이었어. 하지만 사람들이 내게 준 것은 나만을 위한 뜨거운 관심이었지.”
오래간만에 해보는 혼잣말이었다. 누군가 이 말을 들어주기를 원했다. 진심을 들어주기를 원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과거의 일들은 그런 나의 망상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예전부터 사람들에게 계속 외쳐왔었어 하지만 사람들은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아. 단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떠받들지. 그런 우매한 너희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다 같이 죽으면 영혼끼리 뒤섞여서 하나가 되니까 어차피 내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겠지.”
내 손에 들려있는 성냥의 불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따뜻함이 뜨거움으로 빠르게 변해가고 나의 마음 또한 점점 녹아내려 몇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 느껴진다.
뺨에 물방울이 점점 흘러내리지만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져 불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은 아무리 떨어져도 불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해’
문뜩 물방울이 내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이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기쁨으로 입고리가 올라간다.
손을 내 등 뒤로 뻗었다. 마을의 장터에서 1시간 동안 골랐지만 지금 다시 보니 마지막 가는 길에 쓰기에는 초라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색은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이었기에 약간은 기뻤다.
“흥~흐흥”
입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줄을 정성스레 묶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자주 부르셨던 노래, 마지막 까지 제목은 알지 못했던 노래.
노래의 일절이 끝날 때 쯤 멋진 목걸이가 완성 되었다.
이제 내 목을 거는 일 만이 남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다.
네이버 웹 소설에서도 절찬리에 연재중!!
네이버에서 구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